[특별기고] 고통을 다루는 법

[특별기고] 고통을 다루는 법

‘삶은 고해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위의 글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스캇 펙이 쓴 책에 나오는 말이다.  삶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가 인정할 수 있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고통을 없는 삶을 살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쓰곤 한다.  한국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겪었던 우리의 부모님들은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눈, 코 뜰 새 없이 일을 하면서 살았고 그 덕택에 한국의 경제는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좋아지게 되었다. 이것 만을 보면 노력하고 애쓰면 고통이 사라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난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놀라운 성장을 한국은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다 가져다주진 못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모양의 고통이 존재한다. 경쟁으로 인한 고통, 상대적인 빈곤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상실로 인한 고통, 이러한 고통은 예전이나 동일하게 존재하는 고통이다.

어린 시절, 우리 엄마는 경제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공부시키느라 허드렛일을 하시면서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하셔야 했다. 그래서 그러신지 자녀들은 그런 고생을 하지 않고 살 길 바라셨다. 그래서 필자가 결혼한 후 여전히 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는 힘들어하셨다.  그것은 딸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게 사는 것을 보고 고생을 한다고 생각 하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가는 여자의 삶이 마치 고생이 없는 성공한 삶인 것처럼 말씀을 하셨는데 나중에 철이 들고 나이가 먹어서 알게된 사실은 사람은 누구나 손에 물을 묻히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  삶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말을 지속해서 들었던 내가 엄마의 말을 진리로 믿고 손에 물을 묻히고 살며 적당한 삶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나의 삶을 비참하게 생각했다면 나는 정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상담을 공부하지 않고 신앙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인 지를 바로 배우지 못했다면, 나는 엄마의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면서 어떡해든 내 삶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소위 ‘부자’로 살아가는 것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부요해졌을지는 모르나 끊임없는 목마름과 허덕임 속에 여전히  또다른 고통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감사하게도 나는 고통이 없는 삶이 좋은 삶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고통을 없애고 피하는 삶이 아니라 내 삶에 있는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과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 믿고 살아간다.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더 이상 삶은 고통스럽지 않다 라고 말한 스캇 펙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이나 삶에서 없애 버릴 수 없는 삶의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미래를 향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럴 때 삶이 살아갈 만한 것이 될 수 있다.

한 여성 분이 젊은 나이게 집에 돌아오던 길에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 경험은 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고 그 이후로는 모든 남자들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 없었을 뿐아니라 자신도 늘 더럽혀졌다는 생각에 자신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그 여성 분은 그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늘 그런 사건을 경험한 자신으로 인해 피해의식을 느끼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고립적으로 살고 있었다.  그 분은 과거의 상처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서 오늘을 살지 못했고 그것은 그녀의 현재는 미래로 이어져 수 십년의 삶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이 여성처럼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의 사건을 잘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면 그 고통은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은 지속적인 고통을 가져다주어서 계속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 외로 상담 현장에는 이런 분들이 많다.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해서 오늘과 미래를 살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을 주었던 과거라 할 지라도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그 과거는 성장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용서’하고 나를 수용하며고 비록 힘든 여정을 거쳤지만 오늘날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아갈 때 과거의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성장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상처를 입은 많은 사람들 중 회복이 잘 되지 않고 성장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용서를 잘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용서를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 지를 먼저 토해내고 표현하는 과정들을 꼭 거쳐서 죽을 만큼의 고통과 어려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서 경험한 아픔과 고통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꼭 용서의 과정을 거칠 때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하면 그 사람과 다시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용서는 내가 그 사람의 심판자가 되는 것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내려 놓겠다는 의미다.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에 간섭해서 복수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신께 복수를 맡기는 의미이다.

그리고, 고통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하기 보다 현재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은 그 고통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고통을 다루는 법이다.  수용 전념 치료에서는 고통을 없애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고통을 없애려고 할 때 그 고통이 더 크게 경험되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괴로운 생각을  안하고 싶은데 불안하거나 강박증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괴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예로 잠을 자야지 라고 하면 잠이 더 안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이런 고통이 있구나 라고 그 고통을 인정하고 ‘그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신의 삶의 가치를 향해 살아갈 수 있어’ 라고 할 때 고통스러운 삶에서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우리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상담 기법 중에 EFT라고 하는 기법이 있는데 그 기법은 많은 정서적 고통을 다루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거기에서 자주 쓰는 문구가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묘사된다. “비록 내 삶에  어려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도 나는 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용납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우리의 삶에 고통이 있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서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그 고통과 함께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고통은 회피하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

 

특별기고자 :

Rev Dr. HUN KIM (김 훈)

호주기독교대학 대표/총장  (President of 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

One and One 심리상담소 대표 (CEO of One and One Psychological Counselling Clinic)

호주가정상담협회 회장 (President of Australian Family Counselling Association)

한국인 생명의 전화 이사장 (Chair of Board in Australia Korean Life Line)

ACA Registered Supervisor (ACA등록 수퍼바이저),

ACA Member Level 3 (ACA정회원)

기독교 상담학 박사 (Doctor of Christian Counselling)

목회상담학 박사 (Doctor of Pastoral Counselling)

고려대학교 국제경영 석사 (MBA of International Business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MdiV at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BA of Mass Communication at Korea University)

총신대학교 신학과 졸업(BA of Theology at Chongshin University)